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문단 편집) === 남베트남에서의 프랑스의 정치적 패배 === 일단 프랑스는 남베트남 쪽에서는 억압자에서 협력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기에 군대를 빼지 않아도 됐지만 베트남국의 주권을 제한해서 보호국으로 만든 것에 대한 민심의 반발은 컸다. 처음에는 베트남국의 기득권층이 친불 성향이 강했기에 영향력이 유지되었으나 이들 기득권층의 세력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급진 반공주의 연합조직 '혁명위원회'와 [[응오딘지엠]]의 정치적 동맹이 대두되면서 남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입지는 급격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양쪽 모두 반불 성향이 아주 강했기에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조직 FEC의 존재를 몹시 불편해했고 각종 프로파간다로 프랑스군을 비판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남베트남인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이용해서 '프랑스인이 베트민과 협력하면서 뒷통수를 친다'는 삐라가 퍼지기도 했다.] 총리가 된 응오딘지엠은 친불 세력들을 대거 숙청해 버리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는 총선거의 행정업무를 돕고 선거 실시를 감독해야 하는 휴전협정 이행조차 방기하고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철수해 버렸다. 남베트남에서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축출되어 버린 것. 한편으로 이 혁명위원회는 베트민에게 배신당한 인사들이 주 구성원이었던, 따라서 베트민이 하는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을 만큼 베트민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기에 총선거 자체가 베트민의 비열한 획책이라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총선거를 반대했다. 응오딘지엠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총선거에 반대했고, 남베트남의 여론 역시 이에 호응해서 20만에 달하는 대대적인 반 총선거 시위가 55년에 사이공에서 열렸다. 결국 총선거는 남베트남 대부분의 거센 반발로 무마되었고, 대신 [[베트남 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분단이 장기화된다. 이로 인해 이 인도차이나 전쟁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침공|허무하게 본토가 함락된 사례]], 그리고 학살과 추태로 얼룩진 [[알제리 전쟁]]과 함께 현대 프랑스군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나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등 프랑스 극동원정군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6.25 전쟁]]에 빗대며 구시대적인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최소한 반공을 위한 이념 대리전이라고 주장했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등과 달리 공산주의 세력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군사원조를 받으며 이전 종주국에 대한 무력투쟁을 이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2차대전 이후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전쟁에 가깝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차라리 몇 년 차이를 두고 폭발한 [[말라야 비상사태]] 때 화교 공산반군을 종국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한 영국에 비해도 한참 떨어지는 결과다. 최소한 화교들과 무슬림의 종교적인 차이 때문에라도 현지 화교 반군을 지지하는 대신 자치와 종국적으로는 독립을 보장하고 실제로 이뤄준 영국에 협조하기로 한 말레이인들의 지지를 얻어낸 영국에 비해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부활이라는 결함 많은 목적 때문에 식민지인 다수에게 반공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군사적으로도 공산화된 중국 영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정 때문에 월맹군이 야포와 대공포를 포함한 중화기를 갖춘 정규군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전쟁 목표부터 주변 여건까지 이러한 결과를 처음부터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